결국 다 역량의 문제
스타트업을 하다 보면 난처하거나 어이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 혹은 어떤 결정이든 일단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종종 놓이곤 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질문 내지는 상황을 몇 개 골라보자면 이런 것들이 있겠다. 스타트업의 기술부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어쩔 수 없고 오히려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입장과 아주 경계해야한다는, 기술부채가 조직을 결국 무너뜨릴 것이라는 두 입장. 스타트업에서 매출은 늘지 않고 사용자만 늘어나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 솔직한 피드백은 좋지만, 듣는 이를 좀 더 배려하며 말해야 한다는 입장과 어떻게 말하든 알아서 잘 듣는 사람들이 조직에는 더 필요하다는 입장. 이런 종류의 물음은 마치 양자택일의 상황처럼 내게 현현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이럴 때마다 나는 무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모종의 압박을 느꼈다. 그런 탓에 상황의 꼬임에 넘어가 나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었고, 말재주로 이 선택을 정당화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내 후회하곤 했다.
요즘에는 결국 다 역량의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X와 Y 중 무엇이 좋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조직의 역량이 Z인 상황에서) X와 Y 중 무엇이 좋을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답변은 사실 "X가 낫겠네요"가 아니라 "(조직의 역량이 Z임을 고려하면) X가 차선 정도는 되겠네요"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돌이켜보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양자택일의 문제로 둔갑해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사실 답은 두 선택지에 없었다.
스타트업에게 기술부채란 무엇일까? 그리고 기술부채를 어떤 입장으로 바라봐야 할까? 내가 요즘 내린 결론은 이렇다. 기술부채는 적을 수록 좋다. 그렇다고 기술부채를 안고 가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조직의 역량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조직의 역량, 여기서는 제품개발 역량이라고 하자. 제품개발 역량이 뛰어난 조직은 기술부채를 전혀 만드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최적점을 찾아 개발하는 족족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아 아주 성공적인 제품을 만드는 팀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에게 실패비용을 낮추는 접근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조직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기적이 몇 차례 반복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기적이 몇 차례 반복된다면 그 조직은 결국 그만큼 뛰어난 역량을 갖춘 것이다. 이들에게 기술부채란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제품개발 조직을 보자. 이들은 제품도 못 만들면서 개발도 잘하지 못한다. 이 조직은 기술부채는 만들고, 제품개발에는 실패한다. 사실상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이겠다. 그런데 사실 내가 더 경계하는 조직은 다음의 모습이다. 이 조직은 기술부채는 절대 만들지 않는다. 대신 제품개발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게다가 기술 조직은 본인들은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는 본인들이 (제품 조직에 비해 더) 잘 한다고까지 생각한다. 이들은 기술부채를 만들지 않는 방법은 알지만 어떻게 제품을 만드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조직은 기술부채가 없는 만큼 기술자산 자체가 없다. 이들의 성공은 여러 의미에서 기술 조직의 손을 떠나간 것이다. 다른 또 한 가지 조직의 모습은 기술부채를 (어쩔 수 없이) 만들어가며 제품개발에는 결국 성공하는 조직이다. 이런 조직은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스타트업의 반열에는 들어선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부채가 좋은지 나쁜지를 묻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품을 얼마나 잘 만들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물론, 무엇보다 기술부채를 만들거나 안 만드는 선택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어느 시점—물론 이 시점이란 건 시기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면 이렇게 할 것이다와 같은 상황적 시점에 가깝다—에 얼마나의 기술부채를 어떻게 상환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모두 있었다. 성공하는 조직의 기술 창업가들은 달리는 기차의 바퀴를 갈아끼울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건 기술부채를 갚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 그들이 몰라서라기보다는 이 기차가 멈췄을 때 다시 달리게 만드는 게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기술부채를 만들지 않으며 현재의 모습을 만들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적어도 현재의 모습만큼 만들어낼 역량이 있었다. 평가는 늘 사후적이다. 망한 스타트업의 기술 창업가들은 이런 평가를 받아볼 기회조차 없다. 그러니 내게 기술부채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역량의 단계에 따라 임의로 나눈 답변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물론 기술부채에 관한 엄밀한 정의 없이 묻고 답하겠지만.
매출과 사용자 중 무엇에 집중해야 하냐는 질문도 그렇다. 내 대답은 이렇다. 매출과 사용자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하면 가장 좋다. 그런데 (비즈니스 역량이 부족하면) 둘은 쉽게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놓일 것이다. 그러면 일단 하나라도 잘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본인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것 하나에 우선 집중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기분 나쁜 피드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실 커뮤니케이션 역량에도 여러 단계가 있지만, 정말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1) 꼭 해야 하는 불편한 말은 하지도 못하면서 상대 기분만 나쁘게 만드는 사람, (2) 꼭 해야 하는 불편한 말은 못 하지만 딱히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3) 꼭 해야 하는 불편한 말은 곧잘 하지만 상대 기분을 무척 나쁘게 만드는 사람, (4) 꼭 해야 하는 불편한 말도 잘 하면서 상대 기분을 전혀 상하지 않게 말하는 사람. 말 안 해도 뻔하지만 (4)가 거의 항상 대부분의 상황에서 유리하다. 즉 거의 모든 대화에서 (4)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결국 역량의 문제다. 내 주변에는 (3)에 해당하는 창업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의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않고 핵심만 듣는 공동창업자가 있었다. 초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작은 조직이기에 창업자들끼리 의기투합할 수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3)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조직이 성장하지 못한다.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건 공동창업자의 역량이었지 그의 역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기분 나쁜 피드백에 대해 물으면 커뮤니케이션 역량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접근을 조직에 대해서뿐 아니라 제품에서도 취해야 한다. 제품에 있어 단계를 나누는 접근은 Airbnb의 11-star 프레임워크를 참고해도 좋겠다. 결국 얼마나 많은 사용자에게 더 높은 등급(별)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느냐가 지금 우리 제품의 역량인 셈이다. 고객에게 11성 호텔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다만 그럴 수—그럴 역량이—없기 때문이다. 현재 제품의 모습은 지금 제품이 지닌 역량을, 혹은 이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조직)의 역량을 반영한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