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창업을 하는가?

이 글의 원문은 Disquiet에 작성한 글입니다.

메이커스프린트를 참여하며 만난 분들께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성현님은 왜 창업이 하고 싶으세요?"였다. 사실 창업을 하고 싶다는 감정은 꽤 오랜 시간 나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은 무언가였는데, 그동안 그 이유를 특별히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은 순간, 그냥 무의식적으로 마치 GPT가 자동완성이라도 하듯이 "제품 만드는 걸 좋아해서요"라는 답이 별안간 튀어나왔다. 당황스러웠다. 대체 어떤 시스템 프롬프트가 새겨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 뒤로도 이야기가 계속 자동 완성되고 있었다. 언제 내 안의 이 GPT가 동작을 멈출지 모르니 일단은 받아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Airprompt 같은 제품을 썼다면 프롬프트 버전 관리가 훨씬 쉬웠을 텐데!

아무튼 이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내가 제품이라는 걸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게 초등학교 5학년부터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혼자 놀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컴퓨터 게임을 방학 내내 펑펑하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카페에 무작정 '게임 만들기'를 검색하여 우연히 'RPG 만들기 2003'이라는, 소위 '알만툴'이라 부르는 소프트웨어를 발견했고 그 길로 변수와 조건문을 달고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들던 게임은 출시한 적은 없지만 그냥 그걸 만드는 과정 자체가 무척 재밌었다. 엄마는 내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사실 나는 내가 만든 게임을 테스트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커뮤니티에서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에게 내가 만든 게임을 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더욱더 게임을 잘 만들고 싶었다. 당시 나는 이 알만툴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턴제 전투가 아닌, 2D 좌표계를 직접 다뤄야 하는 '액션 RPG'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애정을 쏟은 마법사 캐릭터가 다이아몬드 모양 범위의 적을 모두 공격하는 화염 마법을 쓰면 좋겠는데 이 구현이 너무도 어려웠다. 하나씩 노가다로 조건문을 넣자니 스킬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범위가 늘어나는 걸 도저히 만들 수가 없었다. 조건문이 너무 많아져서 뭐 하나 고치려면 실수하기 일쑤였기에 이건 안 되겠다고 판단했었다. 놀랍게도 나는 이때 유지보수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겪고 있었다.

그러다 수학 시간에 함수라는 걸 태어나 처음 배우면서 내가 게임을 만들 때 사용하던 x, y 좌표계에 관해 배우게 되었다. 그 순간 "아, 이거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드디어 학교가 나에게 쓸만한 걸 가르쳐주는 구나! 그래서 대뜸 선생님께 다이아몬드 모양의 그래프를 그리려면 어떤 함수를 써야 하는지 물었다. 중1짜리에게 설명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하신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우는 내용이라고만 말씀하시고 넘어가셨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대단히 퉁명스러운 말투였는데, 당시에 나는 그저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났었다. 그래서 이해하지도 못할 고등학교 1학년 수학책을 샀고, 다행히 절댓값이란 개념이 그리 어려웠던 것은 아니라 운 좋게도 이 함수를 게임에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마법사는 제대로 된 화염 마법을 쓸 수 있었고 나도 이 일을 계기로 뜬금없이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름이었다.

이후 조금 독특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공통 과목으로 Java를 배우게 되었다. 당시 나는 내가 했던 게임 만들기가 프로그래밍의 일종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수업을 들으며 내가 했던 많은 작업이 코드 작성과 유사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이걸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까만 화면이 아닌, 진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지 여쭤봤다. 아직 1학기였고, 수업의 진도는 반복문 수준밖에 나가지 않았을 때라 선생님은 이러다 말겠지 하시는듯한 말투와 표정으로 USB를 하나 건네셨다. USB에는 HTML 파일로 된, 초보자가 보기에는 대단히 불친절한 Java SE 6 AWT 레퍼런스 문서가 있었다. 그 USB가 곧 나의 다음 다이아몬드 함수임이 분명했다. (그 USB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내 성적이 그렇게까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득한 불친절한 레퍼런스 문서와 한 달 정도 끙끙대며 '영어 단어 시험 채점기'를 완성했고 성공적으로 교내에 배포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은 영어 단어 시험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어 단어장의 예문을 정말 말 그대로 한 토씨도 틀리지 않게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 아무리 달달 외워가도 반타작을 하기 일쑤였다. 메이커로서 운 좋게도 고통의 크기가 큰 문제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영어 단어장의 각 챕터를 선택하면 해당 챕터의 모든 영어 단어가 랜덤한 순서로 나오며 실제 예문과 100% 정확히 일치하는지 채점해 주는 프로그램을 Java AWT를 활용해 만들었다. 당시 나는 DB라는 것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프로그램과 함께 배포한 txt 파일을 DB로 사용할 만큼 허접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불쑥 찾아왔다. 어느 영어 단어 시험 직전의 자습 시간에 나는 교실 맨 뒤 줄에 앉아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의 모든 친구들이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눈앞의 모든 사람이 내가 만든 제품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광경. 10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이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 제품 만드는 즐거움을 확실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문과였던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컴퓨터공학과로 진학 목표를 바꾸게 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주인공인 슈팅 게임'을 만들어 CD 하나당 1,000원에 팔기도 하고 '학교 친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워크래프트 3 유즈맵'을 만들어 당사자들과 직접 엔딩을 보기도 하고 'Java Swing—AWT에서 업그레이드되었다!—기반의 영국 문학 시험 준비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번에는 내 성적을 구원하기도 하고 '닷넷 기반 학교 내부용 커뮤니티 사이트'의 관리자를 맡아 전혀 새로운 웹이란 환경을 경험해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품 만드는 즐거움을 배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학교 수업은 완전히 뒷전이었고 하루라도 빨리 창업하고 싶었다. 이건 다분히 고3 1학기에 읽었던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의 영향이었다. 아직 너무 어렸던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창업 = 제품 만드는 일'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생겼고, 그래서 대학생이 되자마자 창업하겠다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물론 창업에 대한 완벽한 착각이었지만 창업이 제품을 만드는 방법의 하나였던 건 맞기에, 이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후 두 번 정도 창업을 더 해보며, 결국 대표가 아니면 제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지금은 또 한 번의 창업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내게 창업의 동기를 물으면 치기 어린 마음에서 혹은 스스로도 잘 모르기에 이러저러한 그럴듯한 이유를 대곤 했었다. 그러다 가장 최근에 실패한 창업을 통해 통장 잔고가 0원을 찍어보고서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내가 말하고 다녔던, 혹은 생각했던 그런 이유에서 창업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냥 창업 그 자체를 너무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냥 무언가를 만드는 게 가장 재밌으니까, 창업을 계속하고 싶었던 거구나. 이 마음을 오랜 시간 잘 간직하기 위해 공개적인 공간에 이토록 사적인 글을 썼다. 이 마음을 잘 간직하면 나도 언젠가 USB를 지팡이 삼아 다이아몬드 범위로 화염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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