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디드
오늘에서야 〈그라운디드〉의 엔딩을 봤다. 엔딩 자체는 사실 일주일 전부터도 볼 수 있었지만 정든 이 작은 세계를 떠나기 싫어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기를 미뤄왔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어쩔 수 없이 164시간의 대장정을 마쳤는데 어째서인지 씁쓸함에 속이 쓰렸다.
〈그라운디드〉는 영문도 모른 채 몸집이 작아진 아이들이 무시무시한 곤충이 가득한 마당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가는 게 목표인 생존 액션 게임이다. 나는 어릴 때 『곤충세계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를 정말 정말 좋아했는데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마치 이 책의 내용을 직접 경험하는 것만 같아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즐겁게 게임을 즐겼다. 어릴 때 곤충학자가 꿈이었던 학생은 지금은 정말 어이없게도 세상에서 곤충을 제일 무서워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그라운디드〉를 하면서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그라운디드〉는 순수 게임으로써의 공포와 설렘을 선물했는데, 게임에서 몬스터와 전투를 하면서 정말 그 몬스터가 너무 무섭고 징그러워서 비명을 질러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옆을 스치는 개미의 사실적인 묘사와 소리에 소름이 돋았고, 잔디 사이를 방황하다 갑자기 마주한 무당거미를 보고는 몇 차례 소리 내 비명을 질렀다. 곤충을 정말 싫어하는 탓에 〈그라운디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완전한 몰입을 제공하는 게임이었고, 내게는 무서운 곤충이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마음 졸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그 의미 그대로의 정말 간절한 생존 게임이 되었다.
오랜만에 두 손 가득 땀을 쥔 그 순간들은 나를 예전의 어떤 순간으로 데려가 주는 것만 같았다. 10년 전에 뱅크샐러드를 처음 만들 때 나는 자신만만했다. 세상에 나를 증명하고 싶어 했고 어렵고 해결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문제에 매달리기 좋아했다. 잃을 것도 별로 없었고, 스스로에게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매일매일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두렵기보다는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품과 회사는 점점 커지는데 나는 작아지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일이 잦아졌다. 몇 년을 함께한 익숙한 공기가 언젠가부터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20대를 온전히 걸었던 형체 없는 무언가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기 일쑤였고, 이런 반복된 경험은 결국 지독한 우울로 이어져 이렇다 할 모양도 남기지 않은 채 내 삶에서 결국 사라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라운디드〉의 작은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다시 불확실성과 도전을 즐기던 예전의 그 어떤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 세계를 떠나기가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마음을 되찾아 수수께끼의 기계를 고쳐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가 보려 한다. 내일부터 다시 뱅크샐러드에 출근한다. 이번에는 마당에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마당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라운디드〉의 작은 세계를 탐험하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좋은 게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