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창업하고 있기
지난 창업에 관해 에둘러 말하는 글을 쓴 적은 있지만 직접적으로 지난 창업에 관해 글을 쓴 적은 없었다. 여전히 지난 창업을 생각하면 여전히 쓰리고 나도 잘 모르겠는, 잘 포착되지 않는, 그런 모호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 과거에 대한 미련을 조금은 털어버리고 미래에 집중하기 위해, 또 글을 적으며 스스로의 다짐을 위해 이 글을 적는다. 우리가 무엇을 시도했고 어떤 교훈이 있었는지 좀 더 실용적인 이야기는 공동창업자였던 서자영 님의 회고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나는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나는 지난 창업 이전 뱅크샐러드에서 만 8년 근무했다. 약 6년은 CTO의 역할로 있었고 그중 약 2년의 세월은 뱅크샐러드 앱의 제품 시장 적합성1을 찾는 여정의 제품 리더 역할 또한 겸하고 있었다. 제발 뱅크샐러드 앱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20명 가까이 되는 전체 팀원 앞에서 울먹거리며 호소해 보기도, 100명이 넘는 기술 조직 인원들 앞에서 정말 곤란한 얘기를 감정을 눌러가며 간신히 말해보기도, 또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부끄럽게도) 모두의 앞에서 화를 내본 적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송을 치르기도, 대학을 자퇴하는 결정도 해보며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제품을 만드는 측면에서도, 리더십의 측면에서도, 인간 개인의 어떤 정신력 측면에서도 창업을 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술 조직의 책임자가 아닌, 대표의 역할로 직접 창업을 시도했고 실패로 끝났다.
우리의 창업이 실패라는 걸 자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런웨이가 끝났는데 우리 비행기는 여전히 뜨지 못하고 있었다. 허무하게도 그 사실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뿐이었다. 지난 창업을 위해 어떻게든 모은 현금은 다 떨어졌고, 혹시 몰라 만들어 놓은 마이너스 통장 역시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지금 거주 중인 집을 담보로 한 번 더 대출받아 우리의 수명을 연장해 볼 것인지 고민해야 했을 때 나는 어렵지 않게 다음을 기약해야겠다고 선택했다. 어떻게든 런웨이를 늘려 그사이에 운 좋게 괜찮은 아이템을 찾아 투자받는다고 해도, 투자금 대부분을 생활비와 빚 갚는 데 쓰게 될 게 분명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결정은 스스로에게도 팀에게도 투자자에게도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지나치게 차갑고 이성적인 상태였기에 판단과 마음 먹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제 정말 끝이라는 걸 깨달은 그다음 주에는 삶의 허무를 견디기 어려울 만큼 거셌던 감정의 폭풍을 겪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이번 창업은 내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에 후회는 전혀 없었다. 내 인생의 가장 위험한 가설인, 창업자로서의 나를 한 번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였고 덕분에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막상 창업을 해보니 지금까지의 고생이 헛고생은 아니었다는 것도,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앞으로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지도 명확해졌다. 내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자본이었다. 다음 창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많은 자본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현금과 사회적 자본 둘 다를 뜻한다.
창업을 실제로 해보니 초기 창업자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역시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이라는 말에 매우 공감했다. 일단 살아남아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모든 역량은 일단 살아남은 이후에야 쓸모가 있는 것이었다. 이 '생존력'은 아마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나는 금전적인 측면에서의 생존력이 현재 바닥인 상태라 스스로 진단했다. 따라서 어떻게든 빚을 다 갚고 최소한 1년 이상 버틸 수 있을 수준의 충분한 양의 현금을 마련하는 걸 가장 중요한 마일스톤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 목표 달성을 위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는 되는대로 뭐든 해보려고 한다. 온라인 강의를 찍든 유료 커피챗(멘토링)을 운영하든 씨리얼을 만들어 팔든 어떻게든 돈을 모으려고 한다.
두 번째로 큰 필요를 느꼈던 건 바로 사회적 자본이었다. 이펙추에이션의 관점에서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가령 팔로워가 1,000명만 있어도 어떤 가설을 검증할 때 짧은 글 하나로 반응을 쉽게 테스트해 볼 수 있는데, 당시의 나는 아무런 소셜 계정도 운영하고 있지 않던 상태라 간단한 가설 검증도 온라인 광고를 집행하며 테스트해야만 했다. 돈도 돈이지만 가설 검증에 허비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만 있어도 다음 창업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첫 번째 목표는 아직 이렇다 할 액션이 없지만, 우선 뱅크샐러드 가계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개밥 먹기를 해가며 지출을 통제하고 있다. 지출 통제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고 있고, 이제 부수입을 만들어보려고 계획 중이다.
두 번째 목표 달성을 위해서 𝕏를 시작했다. 24년 2월 28일 첫 글을 시작으로 두 달이 아직 안 지난 시점이지만 운 좋게도 팔로워 984명을 모았다. 평소의 나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말했던 글도 여럿 있지만 팔로워를 모으는 게 가장 중요한 상황이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더 준비된 창업자가 되는 게 목표니까.
이번 창업에서 배운 게 또 하나 있다면, 아이템에 대한 것이다. 가설 검증은 풀타임으로 매달릴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노력만 한다면 회사에 다니면서도 충분히 쓸만한 아이템을 발굴할 수 있다. 그러니 회사에 다니면서도 항상 다음 창업 아이템을 준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매일 혁신의 숲에 들락날락하고, 창업과 시장에 관한 좋은 자료를 수집하며 읽고 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크든 작든 다음 창업의 씨앗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한 곳에 모아두고 있다.
이렇게 매일을 다음 창업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고, 좀 더 생산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삶의 구석구석에서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고 있다. 배기홍 대표님의 24시간 피칭 글의 우버 기사처럼, 혹은 예능에서 한 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애드리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부터 '하햐허혀호효후휴흐히'까지의 발음 연습을 매일 하는 이승기2처럼 나도 어쩌면 내 인생에 딱 한 번 있을지도 모를 어떤 기회를 잡기 위해 항상 창업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체로 공이란 이루기는 힘들고, 실패하기는 쉬우며 때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사마천, 『사기 열전』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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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Market Fit(PMF)의 한국어 번역어을 써보았다. PMF에 관한 건 Lenny's Letter의 글을 참고하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