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경험

2023년 8월부터 2024년 1월까지 딱 6개월 동안 창업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는 창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6개월간 밤낮으로 노력했지만, 초기 창업가를 위한 마음가짐에서 찾고자 했던 그런 문제를 찾는 데 실패했다. 쓸만한 아이디어야 많았지만, 창업이라는 게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길인지 뱅크샐러드 8년의 경험 덕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실패하는 데도 실패할 만한 그럭저럭 쓸만한 아이디어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없었다. 최근에 통장 잔고가 말 그대로 0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최저시급으로 버티던 20대 초반에도 돈은 없었지만, 그때는 용기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돈과 용기1 둘 다 없었다. 그렇게 창업 시도는 끝났다.

사실 나는 내 실력에 꽤 자신이 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창업자로 살 수 있을 줄 알았고, 정말로 유니콘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참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왜 그렇게 창업을 무조건 잘할 거라고 자만했을까. 창업을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돈을 모으든 주변의 불편함을 수집하던 뭐라도 준비해야 했었는데 나는 그저 8년간 어떻게든 버티느라 바빴다. 남들처럼 편하게 산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눈물 나게 악착같이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걸 깨달으니 내 모든 지난날이 후회스럽고 원통했다. 창업자로 살기 위해 포기한 수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며 내 앞에 우울로 현현했다. 눈을 감으면 이내 죽음이 찾아오는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우연히 아버님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인즉슨 예전에 아버님께서 골프장에서 우연히 코인회사 대표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마음에도 없던 코인을 천만 원어치 사셨는데, 그 코인이 최근에 국내에서는 상장폐지가 되어 외국 거래소에 헐값에라도 팔아야 하는데 본인이 코인을 메타마스크와 같은 개인 지갑으로 옮기기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아버님은 "그냥 천 만원짜리 골프 쳤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건지면 우리끼리 맛있는 거나 사 먹자"고 하셨는데, 그 말이 참 위로가 됐다. 나도 그냥 1억짜리 창업 수업, 어쩌면 인생 수업을 들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을 텐데 마흔에라도 창업을 할 수 있게 지금부터라도 악착같이 창업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정우성이 생각났다. 명실상부한 고교농구의 일인자 정우성은 전국대회 시작 전에 신사에 들러 이렇게 말하며 소원을 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소원을 비는 정우성

"고등학교 농구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제가 증명할 건 더 이상 없습니다. 저한테 필요한 경험을 주십시오. 아직 제가 못 한 게 있다면. 그 경험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이 소원 덕에 (그의 인생에서 아마도 처음이었을) 패배를 경험한다. 물론 나는 정우성에 비하면 한참 초짜지만, 그럼에도 이번 일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도 꼭 필요한 경험이었으리라 막연히 믿어본다. 혹은 이번 일이 내 인생에서 꼭 필요했던 경험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해 본다. 죽을 곳에 빠지고 나서야 살고, 멸망할 곳에 던져지고 나서야 존속한다2. 훗날 정우성은 미국에서 송태섭과 다시 맞붙게 되는데, 그 둘이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던 건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3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Footnotes

  1. 거의 모든 것의 준비물

  2. 반고, 『한서 열전』

  3. 북산은 산왕과의 경기 이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지만 결승전 문턱에도 못 가본채로 지학에게 패배한다. 아마도 송태섭이 북산의 진정한 리더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